인쇄물로 진행한 비주얼 에세이 작업의 웹 간행본으로,
각 일러스트의 하단 화살표에 그에 해당하는 에세이가 있다.
첫 번째 그림은 이 에세이의 전체 주제인 ‘주변 환경의 변동성’을 다루고, 이 뒤로 이어질 네 개의 소재는 앞에서 밝힌 나의 생각을 방법론적 배경으로 삼는다. ‘모든 것은 변화할 수 있다’는 시선을 통해 바라봄으로써 자신의 삶에 공존시킬 수 있는 외부 대상 4개를 꼽았다.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항상 자신과 다를 수 있는, 타인만의 영역을 고려하는 일이 필요하지만, 자신과의 유사도가 낮을수록 그 단계는 관계의 핵심이 된다. 유독 그 태도가 관계의 핵심이 되는 대상들, 그런 시선이 필요하지만 쉽게 놓치고 마는 대상들에 관해 생각하고자 한다.
집에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당장에 보내야 하는 바쁜 날들을 지내다 보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영영 바뀌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영원히 이곳에서 이 모습으로 살 것 같다는 생각에 이 환경에서 적응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고민한다. 지금 그대로의 조건에 나를 맞출 수 있도록. 그렇게 매년 사계절을 맞이할 준비를 하지만, 비행기 끝에는 1년 내내 여름이나 겨울뿐인 세상이 있다.
팬데믹 시대가 몰고 온 커다란 영향 중 하나는 ‘바뀔 수 있다’는 인식일 것이다. 마스크 없이 숨 쉬는 것마저 당연한 일이 아니게 되었고, 여러 사람을 만나는 일, 학교나 직장의 풍경이 이전과 달라졌다. ‘느끼지 못했던 일상의 소중함’이라는 감각과 동시에, 우리가 훨씬 더 다양한 방식으로 만남과 삶과 배움을 꾸려갈 수 있다는 감각을 얻었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변동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 사는 곳과 일의 형태와 하루의 구성,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등, 모든 요소에는 정해진 모습이 없다는 사실이 삶 가까이에 다가왔다. 기차를, 혹은 비행기를 타고 이곳저곳의 문화와 환경에 터를 잡을 수 있고, 일과 휴식의 분배를 나에게 맞출 수도 있다. 바다에 뛰어들어 다른 방식의 호흡과 중력을 느끼는 것처럼.
얽매이지 않는 창의성, 도전정신, 자유와 한계를 모르는 무한한 감각 - 아이들에게 흔히 기대되는 것들은 어디서 나올까? 세상에 처음인 것이 많은 아이들은 많은 것에 미숙한 만큼, 아는 것에 얽매이지 않아 다양성을 가질 수 있는 초석이 된다. 사고가 확장되기 쉬운 그 시절에 알맞은 교육이나 환경이 주어지지 않으면 아이라고 해도 고착화된 생각을 하게 되어버린다고, 많은 연구와 혹은 그런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들이 말한다. 앞에서 언급한 아이들의 특성은 그 역량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 아이를 마주하는 순간이 오면, 내가 바로 그 환경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다. 내게는 이미 설명할 필요조차 느낄 수 없을 만큼 당연해진 사실들을 되짚어 볼 때. 내가 하는 말이나 내가 보이는 반응들이 아이의 생각을 확장하는지, 끊어버리는지가 느껴질 때. 그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지식들이 아이의 길에 맞는지를 고려해 적당히 숨기고, 대체하고, 때론 강조하면서 기존의 나의 인식 환경과는 다른 영역의 사고 회로를 만드는 일이다. 아직 충분히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아이들이 각자의 방식들로 우주를 여행하도록 돕기 위해, 잠시 무거운 우주복을 껴입고 그 옆으로 뛰어드는 일.
DRINK ME. 내 몸이 손바닥 크기로 줄어들면, 익숙했던 방은 순식간에 전혀 다른 공간으로 변한다. 작은 소품은 생명의 위협이 되고, 음식은 며칠이나 너끈히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커진다. 몸이 커지거나 작아지는 것은 순식간에 주변 대상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정의하게 만든다. 크기가 변화하는 것은 대상을 다르게 인식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그 옆에 나와 같은 크기, 나와 다른 종의 동행이 있다. 작은 틈에 빠져 다칠 수 있고, 나의 음식이 독이 될 수 있고, 향기가 괴로움일 수 있는 나의 동행. 신체, 습성, 생활양식뿐만 아니라 삶의 속도마저 나와는 다른 아이. 그런 우리가 동행일 수 있는 것은,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의 도화지를 내가 마련할 테니 부디 네가 나의 곁에서 삶을 그려 나가길 바라는 나의 마음이 너의 신뢰를 받은 덕택이다. 그러니 오늘도 곁에 누워 네 시선의 높이를 맞춰본다. 나보다 작은 네가 보는 풍경은 어떨지, 나와는 다른 네가 힘든 건 없을지, 어떻게 하면 나보다 빠른 네게 그 시간 안에 좋은 걸 가득 안겨줄 수 있을지.
별은 땅이 어두운 곳에서 뜬다. 항상 그 자리에 있었으나 도시의 불빛이 더 밝은 탓에, 혹은 희뿌연 대기층에 가려버린 탓에 내가 보는 것은 항상 별의 흔적 없는 텅 빈 하늘이다. 땅보다 어두운 하늘에 완전히 익숙해졌지만, 가끔 하늘에서 빛 비스름한 것을 보면 밤하늘의 본래 모습은 이렇지 않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는다.
당연하게 흐르는 전기와 방대한 데이터가 몰고 오는 열기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높은 건물의 유리에 부딪히는 새의 이야기와 터널 위 가끔씩 마련된 숲길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배운, 내게 익숙한 미래의 모습은 쓰레기와 매연을 줄인 이 도시 그대로의 풍경이었는데, 크게 휘청이는 자연의 이야기는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다고 말하는 것 같다. 처음부터 도시의 터였던 것처럼 느껴지는 이 땅에는 사실, 지금보다 더 많은 생이 살고 있지 않았을까? 뒤덮인 도시, 뒤덮인 전기, 뒤덮인 빛과 열은 무엇을 가리고 있을까? 별이 어두운 땅에서만 뜨는 게 아닌 것처럼, 이 땅에 살았던 것이 내 눈에 보이는 사람들뿐은 아닐 것이다.
기술에 관한 논의는 그 발전만큼이나 오래 지속되어 왔지만, 지금에 이르러서 그 발전 자체는 사회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기술과 사회를 떠올리면 어느새 내게는, 마치 두 고체가 부딪히는 일을 보는 듯 여겨진다. 제 모습 그대로 나아가는 기술과, 기존 모습 그대로 기술을 마주치는 사회. 둘은 마법처럼 맞물리거나 어느 하나가 깨지게 될 것만 같다. 그리고 뒤늦게 서야, 그 무엇도 변화할 수 없는 바위 같은 건 아니라는 생각이 따라붙는다. 그것은 둘 중 누가 깨지는가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새로운 발전이 이루어진 사회가 기존과 같은 모습일 리는 없을 것이다. 기술과 사회는 모두 사람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기술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회도 서로를 향해 움직일 수 있다. 기술이 점점 삶에 깊숙하고 세세하게 들어오는 만큼, 삶은 그에 맞추어 생활양식과 복지와 같은 수많은 요소를 변화시키며 길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일의 장소와 개념을 바꾸고, 소외 계층을 뒷받침하고, 동물을 위하는 동시에 아이들에게 다양한 생명을 보여주는 일을 가능케 한다.
그 무엇도 고정되어 있는 모습은 없다는 걸 알면, 모든 걸 바꾸어 새로운 길을 그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