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간략하게 적은 이력
이력: 지금까지 거쳐 온 학업, 직업, 경험 등의 내력
약력은 분명 자신의 지난 경험을 약술하는 것을 의미할 테지만, 나는 그 한 줄 한 줄에 자꾸 사족이 붙었다.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계속 고민하면서 알게 된 것은 내가 상당히 산술형 인간이라는 것이다.
하나를 설명하는 데도 구구절절. 단어 하나로 만족할 줄 모르고, 구체적인 부분까지 다 꺼내 들어야만 속이 시원한 기분이었다.
그럴싸한 '약력'이 되진 못하는 경험들, 그 경험이 나에게 가지는 의미나 생각들, 혹은 경험의 내용들 등등.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약력'의 정의가 가리키는 형식에는 맞지 않는다는 사실과 기나긴 줄글이 주는 심리적 거리감을 무시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점 여섯 개와 마침표를 선택했다. 줄임표로 나의 사족을 한 겹 가려두고, 나처럼 덧붙여진 사족이나 주석까지 찾아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펼쳐볼 수 있도록.
이후의 모든 줄임표에는 가려진 텍스트가 있다.
1996
10. 25 서울에서 출생
……
10 ÷ 2 = 5로 떨어지는 생일의 숫자를 좋아했다.
장래 희망: 화가
초등학생 때 주워들은 직업 중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화가와 헤어 디자이너뿐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어른이 되고 싶지만 머리 모양에 관심이 있던 건 아니라서, 장래 희망 칸에 화가를 적었다.
순수예술의 의미를 알고 있던 것도 아니었고, 미술관에 걸리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대통령이나 우주비행사 같은 이름 사이에 있었기 때문인지 별다른 충고를 들은 적도 없었다.
내가 생각한 일이 화가라 불리는 직업과는 다르다는 걸 안 뒤로는 장래 희망 칸을 채울 때 한 차례 고민을 거쳐야 했다.
2015
건국대학교 철학과 입학
……
표현법의 흥미에서 내용 면의 흥미로 흘러 들어간 곳.
서양철학을 위주로 학회와 스터디를 조금씩 거쳤다.
2016년부터 표현법에 관심이 많은 여러 친구와 창작 모임을 꾸려, 각자의 방법대로 무엇인가를 그리고, 찍고, 썼다.
철학은 무언가를 깊게 고찰하고 생각하는 방법 자체를 배움의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전공 수업 교수님의 말씀을 조금 늦게 이해하고 철학을 정의했다. 지금도 철학은 나에게 방법론이며, 사고의 프로세스를 업그레이드하는 일이다.
2015 -
컴퓨터공학과 부전공 시작 - 중단
……
외부 프로그램에 참여해 컴퓨터공학에 발을 들였지만 경험을 남긴 채 흐지부지 되었다.
마지막까지 넘어보려 했던 이 벽이 있어, 그 후로도 웹이나 앱을 건드리는 일 근처를 서성이고 있다.
2021
학부 졸업
……
데카르트로 들어와,
스피노자를 지나서,
스피박으로 졸업했다.
2022
홍익대학교 대학원 디자인학부 시각디자인 입학
……
2021년부터 대학원 준비를 시작했다.
취미나 독학으로만 부를 수 있었던 드로잉과 이미지 작업 경험이 바깥과 연결되면서, 무언가를 키울 수 있는 토대로 자리 잡았다.
장래 희망: 화가
희망 분야: 일러스트레이션
희망에는 직업을 적지 않기로 했다.
그마저도 하나로 설명하지 못하고 사족이 붙어, 하고 싶은 분야를 줄줄이 늘어놓는 사람이 될 예정이다.
일러스트레이션, 디자인, 글쓰기, 그리고 줄임표.